▲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의 외관연말을 알리는 구세군 종소리가 들려온다. 각자의 삶을 살기에도 바쁜 요즘,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기부는 사회를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. 이 기부문화의 시초는 어디였을까. 바로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한 번은 들어봤을 ‘국채보상운동’이다. 한국 최초의 기부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대구에 자리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찾았다. 국채보상운동, 그 첫 시작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도입한 차관을 갚아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1907년, 대구에서 시작된 기부운동이다. 국채보상운동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. 한국 최초의 기부운동뿐 아니라, 최초의 시민운동, 여성운동, 학생운동, 심지어는 금연운동이기까지 하다.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반발하여 전 국민이 처음으로 하나 되어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. 최근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.▲ 경제주권수호운동의 문을 열다전시관에 들어서면 김광제와 서상돈이 발표한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 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. 그들은 2천만 명이 3개월 동안 금연하여 각자 매달 20전을 모으면 강토를 지킬 수 있다고 외치며, 범국민적인 참여를 독려했다. 국채보상운동의 첫 불씨를 지핀 한 자 한 자에는 대한의 경제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. ▲ 국채보상회 사통 취지서 1907년 2월,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, 김광제, 박해령 등 16명은 국채보상회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. 회장을 맡은 심호택은 주민들에게 취지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며 운동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. 전시관에서는 이 사통을 만나볼 수 있는데, 이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 수 있다. 지역과 신분을 초월하다▲ (좌) 국채보상영수증 (우) 국채보상성책인터넷, 전화가 없던 100년 전임에도 선조들은 붓에 먹물을 묻혀 정성스레 사통과 취지서를 써 보냈다. 대구에서 경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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